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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에게


과거와 기억, 미래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과거를 생각할 땐 개인적인 일이 떠오르고 미래를 생각할 땐 세계에 관한 일이 떠오릅니다. 과거는 개인이 경험한 시간이고 미래는 세계가 경험한 적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과거는 세계가 경험한 시간이고 미래는 개인이 경험할 시간이기도 합니다. 2020년 새해는 시작의 몸짓으로 분주합니다. 어디로부터 어딜 향한 시작일까요.

 

시간이 상실된 시대라고 합니다. 과거와 미래가 ‘끊임없는 현재’를 위한 상품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재가 지속되었을 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현실적인 미래는 보험회사가 파는 상품으로써의 미래이거나 기후문제로 대변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세계-시간으로부터 쫓겨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쫓겨난 세계는 무엇이고 시간은 무엇일까요. 세계와 시간은 다층적입니다. 나와 내가 아닌 타자로 이루어진 세계. 현재와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로 인식되는 시간. 즉 다층이 지닌 다르다는 부정성이 세계를 세계로 시간을 시간으로 만듭니다. 그렇지만 작금의 세계-시간은 다층의 부정성이 아닌 한 층의 동일성으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자본이 세계와 시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평준화하고 규격화하기 때문입니다. 세계와 시간이 인식함으로 인해 의미가 생기는 것이라면, 층이 하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식은 다르다는 부정성으로부터 출발하니까요. 그렇기에 세계와 시간이 존재하려면, 복수의 층이 필요합니다. 즉 나의 층과 타자의 층이 만나는 과정, 자신의 층을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나누는 과정이 필수적일 것입니다. 그렇게 세계와 시간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요? 세계-시간이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층이 쌓여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면, 층을 쌓아 세계-시간을 만들 수 있을까요?

친애하는 친구들에게


저는 여러분에게 과거의 작업을 소환하길 요청합니다. 과거의 작업 혹은 작업이 되지 못한 무엇을 마주하고 그에 대한 일종의 답변으로 새로운 작업을 자유롭게 수행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는 과거의 작업과 현재의 작업이 결합된 콜라주 형태일 수도 서사나 정서적으로 연결된 형태일 수도 있으며 연결성이 없는 작업을 이접하는 형태이거나 제가 상상하지 못한 형태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가 재료로 소비되지 않을 방법을 고민해주세요. 본 전시에선 작업 설명 대신 과거의 작업을 마주하고 새로운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을 기록한 에세이를 책자로 엮을 예정입니다. 나의 층과 나의 층이 겹치고 나의 층과 타자의 층이 겹쳐지는 과정 속에서 운이 좋다면 새로운 세계-시간, 새로운 미래를 상상할 공동체를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세계-시간이 가능할까요? 2015년 한 철학자가 우리의 병든 세계를 진단하며 말했듯 "우리의 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습니다. 즉 우리의 세계는 어디선가 시작돼오고 있었습니다. 우린 나로써의 우리와 세계,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새로운 세계-시간은 기존의 세계-시간을 떠나 지금, 여기에서 곧바로 시작할 수 없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의 오래된 세계-시간에서만이 새로운 세계-시간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현재의 지배적인 세계-시간인 상품으로써의 세계-시간에 저항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새로운 세계-시간을 향한 우리의
시작은 오래전에 시작되었다고요.

 

다시 한번 이 질문을 꺼내 보겠습니다. 2020 우리는 어떤 세계를 어떤 시간을 살고 있습니까? 2020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숫자가 아니라면, 2020 이전 우리가 살았던 그리고 살아온 세계와 시간은 어떤 모습인가요? 더 나아가 2020 이후의 세계와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요?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를 찾아오고 영향을 미칩니다. 파편화되고 단절된, 매일매일 반복되는(것 같은) 일상 속에서 잊어버린 날카로운 감각은 과거의 뭉툭한 얼굴을 하고 찾아옵니다. 과거는 뭉툭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매번 꺼내 보지 않는 기억은 아주 단순한 인상을 갖습니다. 그렇지만 과거를 자세히 바라본다면 오히려 현재를 날카롭게 찌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과거는 우릴 불편하게 하지만, 그를 마주하는 일에 공을 들인다면 잊어버린 소중한 무언가를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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