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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인수

​우물


2015-2020
*탁자우물, 나무, 유리, 그림 55x72x42cm, 41.8x114x30cm 
*무제, 종이에 연필, 오일, 64x47cm
*우물1, 종이에 수채, 51x36cm
*배꼽, 종이에 수채, 36x51cm
*울음소리, 종이에 수채, 51x36cm
*우물2, 캔버스천에 아크릴, 165x 233cm

 다시 오래 글을 쓰지 않았다. 영원히 뜸한 것도 영원히 꾸준한 것도 없었다. 끝까지 싫은 그림도 끝까지 좋은 그림도 없다. 과거의 나를 돌아보는 것은 가도가도, 또 돌아봐도 끝이 없다. 고등학교 때의 그림들이 정리돼 있는 가방을 뒤적이면서 기억하던 한 장의 그림을 찾았고 눈에 드는 몇 장의 그림을 더 기억해냈다. 여러 겹 쌓인 종이들은 그 무게감에 불쾌한 열기가 올랐고 더러워질까 염려되는 부분들도 간혹 있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더럽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오랜 기간 한 동네에 살면 어느 날 하늘의 색이 슬프게 푸를 때, 그것이 그동안 나의 슬픔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지는 않을까. 크고 작은 사건들이 지금까지 항상 있어왔다. 그리고 그런 현상 앞에서 이따금 드는 생각과 다르게 항상 마주하며 온 것들도 있다. 3그루의 느티나무와 한 그루의 은행나무, 오르막길, 나의 시야보다 턱없이 좁은 건물 풍경. 그것이 뜸해도, 뜸하지 않더라도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유치원을 다닐 때의 꿈(그 전일 수도 있다)이 기억난 것은 왜일까. 배꼽티를 입고 너풀너풀한 짧은 치마에 줄무늬 무릎 양말을 신은 마치 광대의 꼴을 한 듯한 내가 제자리에서 깡총깡총 돌고 나의 배꼽이 돌아올 때마다 양쪽의 뾰족한 칼은 배꼽이나 그 주위를 찔러 댔지만 그 따끔함(이 따끔함도 꿈에서는 상상이었을까)에 반사적으로 날뛰면서 도는 것을 멈출 수 없던 꿈. 주위는 어두웠고 찌르는 주체는 크지 않은 작은 존재, 가물가물한 존재였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하는 내 손에 피부와 맞닿은 살들, 겹쳐진 살들에 대해 충동적으로 아무런 맥락 없이 그려진 그림이 있다. 왜 이 그림을 보다가 그 꿈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왔을까. 신체 부위의 실질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특히 외음부의 겹쳐진 형태가 다소 간략해진 표현에 돌고래의 매끈한 주둥이까지 떠오르는 듯 하다. 살을 잔뜩 그려넣은 이 그림을 보고있자면, 아니 어쩌면 첫인상은 그럴 듯 하다. 그림은 내가 아닌데, 나는 그 당시의 그림에서 그 당시의 나를 본다. 이건 뭘까? 적당히 연필을 끄적였다. 적당히 뭔지 모르겠고 적당히 신비롭다. 이제 이것은 사람의 말을 잃고 그저 또다른 나를 데려올 뿐이다. 나는 더, 더, 더 깊은 과거를 들여다보았다가, 다시 생각보다 얕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어항 속에 늙은 산호처럼 하얗게 굳어있을, 광대의 모습을 하고 있을 나를 찾고있다. 광대의 모습을 찾고보니 그것은 고동색에서 벽돌색으로,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빨강과 검정의 줄무늬가 되었고 그것은 광대의 상징이 되었다. 그 광대는 아직도 어쩔 수 없는 춤을 추고 있을까? 발 끝을 디딘 구심점은 점점 강력한 힘을 내뿜고 어느 시점에 도달아 일그러지고 다시 힘 없는 줄다리기가 되어 어둠을 장식하고 나만을 비춘 무대를 장식하고 현실을 집처럼 꾸며주고 있는데, 우물 안에 아직도 들어있니? 아이야.

 

 그것은 죽은 혼령 같은 모습이 아니라 여전히 그녀 속에 살아있는 일부이다.[1]

 

 더 깊은 과거의 꿈을 생각하고 기억 속 가장 어린 나를 불렀을 때, 물이 흐르는 우물을 그렸고 찔리기 직전의 배꼽과 배꼽을 중심으로 접힌 살을 그렸고 울음소리가 예쁜 어둠 속 맹꽁이를 그렸다. 깊이 몰입하지 않는다. 과거의 한 점 한 점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수면 위 떨어진 물방울의 파동이다. 나는 파도를 찾고 있으며 그 파도는 이미 존재하고 있을, 바람같기도 하고 격정적인 회오리, 태풍과도 같은 파도이다. 이 행위는 회고와는 사뭇 다른 결을 가진 것 같다. 나는 과거를 돌이켜본다는 ‘회상’, ‘추억’에 잠식당하지 않으려는 힘을 얻길 바란다. 오히려 지금의 나를 얻길 바란다.

 경계의 두려움에 의한 경직이 풀어지길 바란다. 조금 더 유연하고, 양쪽 발끝을 번갈아가며 깡총깡총 뛰듯이 때론 정신없게 이곳 저곳으로 나의 정신을 보내며, 두려움을 이겨낼 만한 찰나의 강한 힘을 모색하고 싶다. 어쩌면 그것은 먼 훗날을 위한 예지몽이었다. 한동안 나는 이 그림에서 나의 몸 외에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기를 며칠, 오일과 연필선이 마구 뒤섞여 만들어낸 격자무늬를 발견하고는 지금 작업과 더불어 손을 더 보았다. 얼기설기 종이에 안착되지 못한 선들 또한 나를 조금 불편하게 만들었지먼 불편함이 수정의 이유가 되진 않았다. 또 어떻게 보면 너무 촘촘해서 어떠한 수분도 흡수되지 못하고 무감각하다는 듯 털어낼 듯한 질감이라고까지 생각되었다. 나는 더 섞이길 원하고 더 격정적이길 원하고 더 고요하길 원한다. 두려움은 해결하지 않으면 두려움이 두려움을 낳는다. 잘 생각해보면 그 날카로운 것이 나의 배꼽을 향하고 마구 찔러댔을 때 그것은 한 번도 나를 관통한 적이 없었다. 그러면 된 것 아닐까? 잠시 마음을 내려다본다. 하나의 두려움이 끝났다. 잠시 따끔거리는 것 따위의 고통을 나는 개의치 않는 사람일 수 있다. 

 그림이 점점 손에 잡혀가고 있을 때 즈음 이것이 과거의 그 작업에서 나온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서 ‘나왔다’와 과거에서 ‘연상됐다’가 같은 말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혹은 다른 말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거는 현재에서 모습을 계속 감추다가 불쑥 불쑥 전혀 예상치 못한 기괴한 모습으로, 생물은 무생물로, 무생물은 생물로, 나는 내가 아닌 것이 되어 내 눈앞을 덮치곤 한다. 이것은 과거의 작업을 재작업하는 이 프로젝트의 과정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과거의 작업에서 다루었던 과거의 내 생각을 거부하고 밀어내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나는 더 먼 과거를 집어냈고 그것들을 몇 차례 곱씹은 후 그 모든 것에서 도출된 생각의 이미지가 우물이었으며, 그것이 곧 맹목적인 작업의 방향이 되었다. 더 이상의 선명했던 기억들이 무색하게 우물에 물이 지표면으로 새듯이 말도 안되게 퍼져간다. 그리고 그렇게 아끼고 아끼다가 걷잡을 수 없이 쌓여가는 과거의 조각들이 아이디어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 사실이 지금 너무나도 견딜 수 없다. 수많은 생각들이 손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밀려온다. 이 사람의 말 저 사람의 말 나의 말 너의 말 할 것 없이 떠밀려온다. 그러다가 다시 또 사라진다. 어느샌가 나를 찌를 듯한 공포도 사라져있고 거울의 방에 놓여진 듯한 풍경에, 나는 여러 염증이 동시에 느껴지는 찬란한 세상에 놓여져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어린 광대는 어쩌면 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1] <밤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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