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루에기384001>, 임채림, 공업용 pvc, 캔버스 위에 스프레이 페인트와 아크릴, 가변사이즈, 2020
이원정
어느 초여름부터 겨울이 끝나갈 때까지 들여다본 여러 네모들
20XX.여름
.1
탁
- 너는 나랑 진짜 안 맞겠다.
탁
- 벌레도 잘 죽여 나는.
오늘 내 목덜미를 잡고 더러운 구멍을 보게 하는 괴물을 만났어요.
목구멍이 뜨거워지더니 손이 떨렸어요. 옆방 문을 두드렸어요. 아무도 나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며칠 전에 친구가 된 네모가 대답했어요. 나를 토닥여주며 자신의 침대에서 재워줬죠. 그 네모는 잠시 구멍을 잊게 해줬어요. 가위 날 소리만 들리는 새벽과 싸워줬어요.
.2
네모에게 편지를 써봤어요.
—
고마웠어요,
텃밭 울타리 밖에서 작은 거미를 만났어요. 앙상한 나뭇가지와 전선에 얽혀있는 거미줄을 따라 늪 가로 내려갔어요.
동그라미는 이미 그곳에 있었어요.
오 어쩌면 당신의 얼굴은 동그라미일 수 있겠어요.
난 동그라미를 원하나 봐요. 모험을 떠날 거예요.
당신의 동그란 소리를 듣고 싶어요.
.3
네모는 내가 사랑하게 된 여자였어요.
[매일 거울을 보는 여자가 있다 여자는 □
누구나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 는 사실이라고 주장한다 그 믿음이 근거
없는 것이라는 과학적 설명이나 증거 제시
설득으로도 망상을 잡기 어렵다.]
네모는 매일 거울을 보며 그 너머 누군가를 찾아요, 그 거울은 유리와 같아서 얼굴을 알아보기 힘든데 말이죠, 또 거울은 문이 되기도 해요, 문이 되어야 한다고 상상하고 믿는 것일지도 몰라요.
[멀어짐을 위해서 손을 잡는다 멀어질 것을 알면서 닿으려고 한다 이제 □ 는 혼자가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밖으로 나오는 것은, 문을 열고 발걸음을 떼는 것은 헤어짐을 품고 있다]
.4
우리가 앉은 곳은 작고 어두워서 끝도 보이지 않는 구멍. □ 는 구멍 위에 자라난 풀과 꽃을 본다.
.5
2019년, 작은 네모 하나를 5만 원에 샀다. 그곳에 아무것도 심지 못했다. 잡초만 무성하게 자랐다.
□: 엄청 키가 큰 잡초가 있었는데 사라졌어. 어떻게 된 걸까?
ㅇ: 추우니까, 말랐지. 말라 비틀어져가 없어졌지. 그게 죽는 거지. 죽는 게 달리 죽는 거냐. 못 살면 죽는 거지.
□: 그러면 나는 구청 직원이 그걸 뽑아갔다고 착각한 거야?
ㅇ: 그래 구청 직원이 할 일 없냐 네 네모 보러 댕기냐? 겨울 되면 원래 말라 비틀어져 없어져. 뿌리까지 다 말라비틀어지지 뭐.
□: 그럼 내가 잡초 죽인 거야?
ㅇ: 잡초 어차피… 아니, 잡초를 죽인 게 아니고. 고 전까지 잡초를 살리준 기지. 안 그려면 진작 뽑았지. 그런 거지. 잡초를 살려놨드니만, 지가 추위에 못 이겨서 죽은 거지.
□: 그럼 추위가 잘못한거야?
ㅇ: 추윈들 잡초만 죽이려고 추워지냐?
□: 그러면 누구까지 죽여?
ㅇ: 이틀만 바깥에서 빨가벗고 있으 바라 니도 죽지. 으헤헤헤헤헤. 어? 집 없고 돈 없고 옷 없으면 다 죽지. 그게 추위다. 응? 잡초만 죽겠냐? 니는 집 있고 옷 있고 있을 거 있으니까 안 죽고 살았는 기지.
니 텃밭에 나가가 이틀만 뺄가 벗고 스이쓰라. 어? 니 이틀만 스이쓰바라, □ 야, 죽지. 이틀 가지고는 안 죽겠나? 겨울에는 죽을기다. 나는 두 시간 서있으면 죽을기다.
잠온다. 잘래.
□: 자?
ㅇ: 뭐라고?
□: 왜 깼어?
ㅇ: 몸부림, 잠꼬대.
□: 할 말 다 했어?
ㅇ: 내가 할말이 머가 있노. 아흠 아흐 아흐야~
□: ㅇ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어
ㅇ: 아는 거 없다. 생각을 한 개 하는데 두 개 알드나?
□: 아니야?
ㅇ: 아는 거 없다.
.6
□ 는 답답해서 싫증이 났을 거야. 여전히 누구에게나 비밀이고 외로운 □
□ 는 엄마의 품에 안겨 잠시 이곳을 떠났다. 아주 작은 불을 지펴 놓고
2020.8.10
- 크리스마스에 뭐하고 싶어요?
- 크리스마스는 나랑 상관없잖아.
돌멩이로 태어난 듯한 작은 녀석이 그림을 그린다. 눈 앞머리, 눈동자… 눈 모양을 하나하나 짚으며 코로 내려간다. 내 심장은 나도 모르는 새 벌거벗고 무성한 들로 달려간다. 쿵 쿵 쿵
나를 그리던 네가 눈을 올리며 씩 웃을 때 생경한 소리가 들렸다.
7.2
쿵
아이들을 안아주며 마지막 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닫았다.
문을 닫자마자 닫힌 문 없이 모든 문들이 열어젖힌 상태를 상상했다.
- 은니, 은니, 언니, 은니….
서영이가 내 가슴 아래 얼굴을 폭 묻고 그러안은 채로 말한다.
- 나 이제 선생님 아니고 언니야?
서영이는 까치발을 하고 내 가슴 사이에 코를 비비적거린다. 옆에 있던 윤성이는 괜히 내 팔을 한번 건드려 본다.
- 나빠요. 미술 수업 그만두기 싫어요.
- 우리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요. 선생님, 박스 가지고 오세요. 2층 집 만들 거예요.
7월 초여름, 글라스데코로 크리마스 트리 장식을 만들었다. 다섯 달 뒤에도 나를 기억할 수 있겠지?
마르기 전에 손대면 알록달록하게 끈적이는 것들. 아이들은 밤에도 빛나는 것을 좋아한다.
자정쯤 되면 다 마를 거야
그때가 되면 뗄 수 있어 조심히
떼야 해 끝에서부터 천천히
어디든 붙일 수 있어 유리에도 벽에도 문에도
쿵
선생님, 마를수록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아요
선생님, 이제 투명해졌어요 이제 잘 안 보여요
- 보금자리에 잘 보관하자.
- 보금자리? 그게 어딘데?
-
우리 방구석에 있잖아, 어두운 상자. 거기 넣어두고 크리스마스 때 꺼내자.
8.10
- 크리스마스에 뭐하고 싶어요?
지금과 같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다. 당신에게 아끼는 말이 점점 많아진다.
6.26
빛나는 가짜 달과 별을 벽에 꼭 붙여야 했지
두 손을 모으고 작은 어둠을 만들어 달과 별이 빛나게 하자
빛의 질감과 무게감은 공기를 모으듯, 어둠을 만들어서 속을 들여다봐야 느낄 수 있다.
그날 밤 모은 손안에는 모든 것이 환했다
온 방이 환해야 잠에 들 수 있었던 나는 작은 빛으로도 잘 수 있게 되었다.
7.11
당신은 손으로 동굴을 만들어 우리의 두 눈을 감싸고 마주 보게 했다.서로가 서로만을 바라볼 수 있는 어둠 속. 깊이와 시간을 알 수 없는 둥근 회색 방 한가운데 검은 구슬이 있는 듯하다.
이곳 중력의 79배쯤 되는 속도와 힘으로 서로를 끌어당긴다. 우리 사이에 뭐가 있지? 이게 뭐지?라는 말을 반복한다.
아무도 모른다. 2320년대에 처음 발견된 이 칠각형은 누구도 태양계 안에서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없다.
8.23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네모에 나비가 날아들길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