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루에기384001>, 임채림, 공업용 pvc, 캔버스 위에 스프레이 페인트와 아크릴, 가변사이즈, 2020
변진
숲
2015~2020
종이에 아크릴
237*109 cm
2015-2020: 나의 그림에 관한 짧은 글
나의 그림은 추상적으로 표현되며 그것은 종합적 큐비즘(Synthetic Cubism)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종합적 큐비즘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에센스(essence)만을 추출하여 입체를 평면화시켜 단순하게 표현합니다. ‘입체’와 ‘환영적 공간’이 사라진 그림 위에는 대상의 패턴이나 질감을 직접 오려내 그림 위에 턱-하고 붙여서 대상의 본질이나 일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것을 콜라주(collage)라 불렀습니다. 종합적 큐비즘에서 대상을 추상화시킨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내가 인지하는 대상(또는 풍경)에 관한 가장 강렬한 기억과 인상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소거하는 것이죠.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되고 포착되는 것이 바로 내가 느끼는 대상의 본질일 것입니다. 또는, 그 추상은 나와 대상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가 가장 인상깊게 바라보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기억하는 그 날의 색감은 무엇인지 등 나의 시선과 관점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추상화(abstraction)라고 생각됩니다. 큐비즘은 결국 대상의 진실된 본질에 관한 물음이고, 본다는 것에 관한 물음이고, 회화의 본질에 관한 물음입니다.
2015년 당시에 내가 그리고자 하는 추상은 풍경의 기억이었습니다. “97A Charles-Landing” 이라고 이름 지은 기숙사의 풍경은, 질릴 새 없이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풍경이었습니다. 풍경을 목탄으로 스케치하고, 그 스케치를 보고 또 한번 스케치하고, 다른 종이에 다시 또 스케치하면서 그 풍경을 보는 나의 눈의 기억을 되새겼습니다. 블라인드의 푸른 온도, 나뭇가지의 구불거림, 폭설이 쏟아져 온통 하얗게 변해버린 언덕, 멀리 보이는 노란색 집, 나무 울타리… 이 모든 것은 그 해 겨울 희뿌연 기억에서 건져올린 잔상이었습니다. 그 잔상을 분명한 선과 면으로 그려주자, 잔상은 형상이 되었고 그것이 내 눈 앞에 새로운 모습을 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그림은 그렇게 독자적인 존재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2020년 오늘날 나는 조금 다른 추상을 그려보는 중입니다. 더 이상 기억을 그리지 않습니다. 풍경을 경험한 뒤 곱씹어보며 기억의 잔상을 또렷하게 잡아내는 방식이 아닌,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현장에서 경험하는 동시에 그려버립니다. 나의 시선이 앞에 놓여진 사물과 풍경을 사이 사이로 넘실대며 어루만지고, 그렇게 눈으로 만져지는 것들을 그립니다. 그것들은 희뿌옇지 않으며 잔상 또한 아닙니다. 풍경과 내가 함께 있는 시공간에서 나는 더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응시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보기를 시도합니다. 그것은 마치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여는 기분입니다. 최근 이수명 시인의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는 시집을 읽고 현대음악 또는 재즈를 떠올리며 쏟아지는 불협화음 속에서 나타나는 생명력과 우연과도 같은 화음에 관하여 생각을 해보게 됐습니다. 당연한 의자를 당연하게 의자로 바라보지 않는 것, 당연한 화분의 초록색을 초록색으로 보지 않는 것이 대상에게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방법일 수 있겠다고 요즘 들어 느낍니다.
그려지는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페인팅은 페인팅 자체로 독자적으로 존재했으면- 하는 갈망이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마음입니다. 그려지는 대상과 물감이라는 재료의 중간쯤, 그 애매한 경계에 서 있는 그림은 어떤 그림일지 탐구하고 질문하는 것이 내가 추상 회화를 열어가는 방식입니다.